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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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우리네 아버지들이 불렀고 이웃집 선배들이 불렀다. 우리는 그녀의 음악으로 청춘의 성장통을 견뎌냈고 지난한 삶을 위로받았다. 돌아보니 양희은의 음악은 결코 나이 들지 않았다. 다만 깊이 여물어왔을 뿐이다.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17년 만의 소극장 나들이
2015년은 그녀가 데뷔한 지 45주년이 되는 해다. 청바지 차림에 통기타를 멘 수수했던 여대생은 어느덧 예순 고개를 한참이나 지났다. 동시에 이름 석 자만으로도 충분한 수식어가 되는 한국 대중음악의 히로인이 된 양희은. 스스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신을 ‘노래 잘하는 방송인’으로 아는 것 같아 걱정이라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수 양희은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전히 발매한 음반은 음원 차트 순위권을 다투고, 매년 쉬지 않고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는 그녀다. 그동안 주로 대규모 콘서트홀에서 노래하던 그녀가 올해 5월에는 20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양희은의 아담한 콘서트’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소극장 공연은 모든 가수들의 꿈일 거예요. 서로의 숨소리도 들리고 표정도 보이고, 관객들과 긴밀하잖아요. 대극장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기분이죠. 5년 전부터 회사에 소극장 공연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해왔어요. 이제야 실현 가능해졌지만(웃음).”

1970, 80년대를 풍미했던 ‘아침 이슬’이나 ‘하얀 목련’, ‘한계령’ 등이 부모님 세대의 음악이었다면, 그 자식 세대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나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들으며 청춘을 보냈다. 공연장에 오는 관객들 중 유독 부모님 손을 꼭 잡고 오는 자녀들이 많은 것은 그녀의 음악이 세대를 관통한다는 뜻이 아닐까. 느끼는 감상은 다르지만 그들은 노래로 하나가 돼 울고 웃는다.

“노래 들으며 객석에서 우는 분들이 꽤 많아요. 그럴 때면 제가 무슨 ‘엘레지의 여왕’이 된 기분이라니까요(웃음). 아마 음악이 각자의 사연을 통과하기 때문일 거예요. 실제 제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라는 노래를 부를 때면 저도 매번 목이 메거든요. 듣는 누군가도 본인의 아버지가 떠오르겠죠. 게다가 저희 아버지처럼 한눈도 팔고, 사고 좀 치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고요.”

언젠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아버지’를 듣고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서른아홉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녀 나이 마흔이 돼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는 내용의 사부곡. ‘험한 세상에 어떤 남자가 당신만큼 날 사랑해줄까’라는 노랫말에는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이북에서 혼자 남쪽으로 내려와 갖은 고생을 하고 일가를 이루신 분이에요. 그런 집의 첫아이가 저였으니, 쏟아부어주신 사랑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요. 유복했던 시절에 태어나 어린 날 많이 누리고 살았어요. 덕분에 나이가 들어도 명품 가방 같은 데 별 관심이 없을 정도예요. 그림이나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분이셔서 지금의 제 감성과 취향이 형성되는 데도 큰 영향을 받았죠.”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후배 가수인 유희열이 ‘국보급 문화재’라고 극찬한 그녀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것을 꼭 빼닮았다. 젊은 시절에는 동생 양희경과 자신, 어머니까지 셋의 목소리가 거의 비슷해 집으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마다 헷갈려 할 정도였다고.

“목소리는 엄마 것 그대로예요. 잘 타고났다고 해야 하나. 어렸을 때는 감사한 줄 모르고 살았어요. 목청 하나는 자신 있었건만, 5년 전쯤 성대 결절이 심하게 와서 목소리를 잃을 뻔했어요. 석 달 동안은 일상 대화도 불가능할 정도였는데,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그리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에 대해.”

그녀는 목 관리를 위해 잠들 때도, 한여름에도 스카프를 두른다. 소금물을 코로 삼켜서 입으로 뱉는 ‘소금물 양치’ 또한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45년 차 가수의 일과는 작은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혹독하지만, 자신에게는 일상이 된 일들이다.

삶의 또 다른 즐거움, 라디오
시계의 시침이 정확하게 오전 9시를 가리키고, 귀에 익은 시그널 음악이 끝나면 라디오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16년째 MBC 표준 FM ‘여성시대’의 DJ를 맡고 있는 양희은은 4명의 파트너가 바뀌는 동안에도 독야청청 라디오 부스를 지켜온 안방마님이다. 누군가는 출근길에, 누군가는 남편 출근 준비와 아이 등교로 전쟁 같은 아침 시간을 보내고 한숨 돌리는 그 시간에 각자의 모습대로 그녀를 만난다.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라디오는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중 하나예요.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이고요. 첫 라디오는 중학교 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였어요. 거기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음악에 눈을 떴죠. 라디오가 좋아서 한때 프로듀서를 꿈꾼 적도 있어요. 당시 신방과 시험을 쳤다가 낙방하는 바람에 그 꿈은 접어뒀죠(웃음).”

1971년 5월에 데뷔한 그녀는 그해 가을부터 DJ로 처음 자신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결혼 후 미국에서 생활했던 7년, 신혼여행을 다녀왔던 1년 반, 암 수술을 받았던 3개월을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청취자를 만났다. 무려 35년이라는 세월을 DJ로 살아온 것이다.

“저는 웬만하면 생방송으로 사연을 소개해요. 물론 사정상 녹음 방송을 할 때도 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DJ 생활이 완전히 몸에 배서 미국에서 살 때는 슈퍼마켓에서 장 보다가도 라디오 할 시간만 되면 화들짝 놀라곤 했어요. 방송 늦어서 어떡하냐면서(웃음).”

‘여성시대’에는 전국 방방곡곡 여자들의 속 깊은 사연들이 등장한다. 말 못할 비밀부터 시댁 식구, 아이 진로 걱정까지. 주부들은 큰언니 같은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여러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재미있는 사연도 많지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도 있어요. 슬픈 사연을 읽다 보면 목이 메다 못해 아릴 정도로 눈물을 참아내죠. 그마저 안 될 땐 꺼이꺼이 목 놓아 운 적도 있어요. 방송국에 그런 아픈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들은 정말 아무 데도 털어놓을 때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오죽 힘들었으면 그럴까. 어떻게 사는 게 이럴까,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파요.”
매 맞는 아내의 사연을 읽은 날은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내 일도 아닌 걸’ 하고 털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아서 때로는 타인의 아픔이 가시가 돼 자신을 찌를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어요. 방송 끝나면 잊어버려야 하는데, 성격상 그게 안 되더라고요. 나라면 어땠을까. 매를 맞느니 굶어 죽더라도 뛰쳐나왔을까. 이런 여러 가지 상상을 해봐요. 그때가 한창 갱년기였는데, 저까지 같이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새벽 일찍 방송국에 가서 한강 둔치를 걸으며 방송 전에 마음을 다스려요. 바람 쐬고 들어가면 좀 괜찮아지니까.”

그래도 ‘여성시대’ 덕분에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그녀는 꽤나 자주 지금껏 자신을 키운 8할이 청취자들의 사연이라고 말했다.

“방송국으로 오는 수많은 사연처럼 삶은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해요. 참 각양각색이죠. 인생이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다가도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도 들고. 하지만 라디오 덕분에 세상을 보는 시야나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이 여유로워진 건 분명해요.”

자택이 있는 일산에서 여의도에 위치한 방송국을 가기 위해 매일 아침 6시 30분에 현관문을 나섰지만, MBC가 상암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부터는 출근 시간이 1시간 정도 여유로워졌다. 덕분에 16년 만에 남편과 오붓한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남편이랑 자그마치 16년 만에 아침 식사를 같이하는 요즘이에요. 예전에는 아침에 눈 떠서 ‘갔다 올게!’ 하고 뛰쳐나가기 바빴는데, 1시간의 여유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덕분에 대단히 행복하답니다(웃음).”

인생 후배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
그녀는 서른다섯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가수 양희은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7년을 보냈다. 정신없이 사느라 추억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양희은의 서른 그리고 마흔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30대는 인생에서 가장 예쁠 나이잖아요. 커리어를 완성하고, 가정을 만들고, 엄마가 돼 생명을 품는 때죠. 그렇지만 제 30대는 굴곡졌어요. 서른하나에 난소암 판정을 받아 석 달 시한부 인생을 살았고, 건강을 되찾은 줄 알았던 서른아홉에 다시 한번 큰 수술을 받았죠. 마흔이 넘어 한국에 돌아와서는 적응하며 사느라 바빴고요.”

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40대 중반이 훌쩍 넘어서야 그녀는 노래가 자신의 운명이란 걸 깨달았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공연을 하고 관객들을 만났다. 그 순간이 곧 행복이었고 비로소 음악이 각별하게 느껴졌다.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저의 30대도 그렇고, 우리 세대의 젊은 날은 좀 어설펐어요. 시어머니 눈치 보랴, 남편 챙기랴, 자식 뒷바라지하랴 등등. 지금은 예전보다 좀 더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요? 요즘 30, 40대는 예전보다 훨씬 지혜롭고 뭐든 빨리 하더라고요. 그 모습 자체로도 빛이 나요. 스스로가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인생의 행복은 무엇인지 깊이 성찰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훨씬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술이 익듯 인생도 맛 좋게 익어가는 거죠.”

예순이 넘어서도 양희은이라는 브랜드는 견고하다. 음악을 통해 세상을 살면서 깨닫는 성찰을 이야기해왔던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노래하는 일을 쉬지 않을 거라고 했다.

“계속 일해야죠. 그 노하우가 얼만데요. 45년의 노하우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어요. 젊었을 때는 몸이 가벼우니까 날아다니죠. 나이가 들면 몸은 예전만 못하지만 대신 연륜과 지혜가 생기죠. 이걸 왜 가만 놔둬요, 아깝게!(웃음)”
친한 후배들을 만나 대화하는 시간이 요즘 그녀의 낙이다. 인생 선배로서 따끔한 충고도 애정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개그우먼 이성미를 필두로 박미선, 송은이 같은 ‘일산 패밀리’와 친분이 두텁다. 그들과의 우정은 나이보다 젊게 사는 비결이기도 하다.

“후배들과 모여서 마음껏 웃고 즐겨요. 맛있는 음식도 먹고요. 개그 분야의 후배들에게 더 정감이 가요. 의리 있고 예의 바르거든요. 아이들과 왁자지껄 떠들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한층 젊어지는 것 같아요. 다들 일산에 살아서 쉬는 날이면 서로의 집에 오가며 절친하게 지내고 있죠.”

음반 작업과 공연, 라디오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양희은의 건강 관리법은 좋은 음식을 잘 챙겨 먹는 것. 젊은 시절 큰 병을 앓고 치료하는 동안 음식에 대한 절절함을 알게 됐다.

“‘네가 먹는 음식이 곧 너다’라는 말이 있어요. 되도록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드세요. 라면이나 인스턴트 식품으로 때우지 말고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제가 투병 생활하는 동안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주셨어요. 남편이 아픈 뒤로는 제가 항상 도시락을 싸줬고요. 질 좋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게 건강해지는 첫 번째 비법이에요.”

날이 따뜻해진 최근에는 집 근처 공원을 자주 걷는다. 꽃이 만개한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걸음을 내딛으며 그녀는 인생의 다음 걸음을 생각한다.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양희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인지 감사할 따름”

“음악을 언제까지 해야겠다는 거창한 장기 계획은 없어요. 다만 지금 노래하고 있는 이 순간을 즐기며 매달, 매년의 계획을 세워갈 뿐이죠. 요즘은 젊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하는 일이 즐거워요. 디지털 싱글들이 모이면 지난해 발매했던 「양희은 2014」처럼 정규 앨범을 낼 생각이에요. 올 해는 공연을 통해 많은 분들과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싶어요.”

살다 보면 봉우리도 있고 계곡도 있다. 앞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고난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양희은이 좌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음악 하는 사람의 아픔은 노래의 울림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수가 겪은 아픔은 거름이 되고 노래는 그 위에 찬란한 꽃을 피워낸다. 대학 시절부터 양희은의 음악을 플레이 리스트에서 빼놓은 적 없던 기자는 인터뷰 말미, 앞으로도 계속 노래해달라는 말을 전했다. 그녀가 고개를 경쾌하게 끄덕이고는 씽긋 웃어 보였다. 오래도록, 고맙도록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박재찬 ■장소 협찬 / 렌탈스튜디오 모인(02-334-2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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