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가수
서강대 사학, 
2019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양희은 가수
서강대 사학, 2019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1970년대 통기타 줄 위로 솟구치던 양희은의 노래는 그 음색의 청아함으로 씩씩함과 쓸쓸함의 급커브를 돌았다. 한때 저항의 노래로 거리를 휩쓸었으나 기실 그의 목소리는 목련이 지는 봄밤이나 계곡물의 온도가 변하는 가을 아침, 혼자서 듣기에 가장 좋았다. 깨어짐과 헤어짐을 감당하며 흐르듯 노래하던 내 젊은 날의 가수가 저렇게 묵직하게 투명하게 거침없이 나이 드는 모습을 보니 그 기백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
(Minds Connector)
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위대한 대화’ 저자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 (Minds Connector) 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위대한 대화’ 저자
‘그러라 그래’에 이어 출간한 가수 양희은의 신작 에세이 ‘그럴 수 있어’는 출간 몇 주 만에 베스트셀러 상위에 안착됐다. ‘그럴 수 있어’, 10㎝ 볼펜으로 단번에 써 내려간 양희은의 개운한 구어체가 겨울 동치미 국물처럼 시원하게 가슴을 적신다. 햇빛이 정수리에 내려 꽂히던 무더운 어느 날, 시간의 단차를 두고 양희은을 두 번 만났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 스타필드 별마당 무대에서 관객을 앞에 둔 공개 인터뷰로 한 번, 일주일 후 마포구 MBC 근처 카페에서 다정하게 마주 보고 또 한 번. 두 번 다 착용한 캔디 컬러 셔츠와 안경이 화사했고 청바지가 잘 어울렸다. 서울 사람이라 또박또박 타자 치듯 정확히 말할 뿐, 실상 남 앞에 못 나서는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그는 인터뷰 무대에서 하염없이 떨리는 마음을 드러냈다. 글 쓰는 건 너무 어렵고 나이 들면 머리도 물기 없는 사막 같아 미완성의 노랫말만 잔뜩 쌓여있다고. 나는 이 관록의 어른이 뿜어내는 정처 없는 정직에 깊이 매료됐다. 이누이트를 좋아하고 ‘파브르 곤충기’를 읽는 70대 여성. 스스로를 성인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라고 진단하는 이 형 같은 국민 언니를 만나보자.
양희은 가수.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양희은 가수.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그러라 그래’에 이어 ‘그럴 수 있어’ 연작시 같은 책이 나왔다. 참으로 양희은답다는 생각을 했다.
“다 후배들에게 툭툭 던진 말이 모아졌다. 사람들 말에 가타부타 속 끓이는 후배를 만나면 신경 쓰지 마. 그 사람들 그냥 ‘그러라 그래’ 하고 툭 쳐 준다. 자기가 한 행동에 노심초사하는 후배들한테는 네 입장에서 ‘그럴 수 있어’ 두둔도 했고. 한쪽이 한쪽을 밟아버리면 그건 좀 가슴 아픈 일이니까, 상대 입장에서 보면 그쪽도 살려고 그러는 거니 ‘그럴 수 있어’⋯, 그랬다.”


양희은의 책을 읽다 보면 명사, 동사, 형용사, 접속사처럼 목적이 분명한 똑똑한 말보다 ‘도무지’ ‘문득’ 같은 변두리 부사가 사소하고 헛헛한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문득 궁금하다. 가수가 된 건 운명인가.
“나는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인생이 이 길로 끌고 왔다. 나무 그루터기로 가려다 화단 경계석을 들이받은 자전거처럼. 언젠가 강화도에서 자전거 타다 몇 미터 아래 밭두렁으로 굴러떨어질 때도 그 생각을 했다. 인생이 참 이상한 곳으로 날 끌고 가는구나. 나는 오십 줄에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자전거 교실에서 수료증까지 받았는데, 그때 제일 먼저 넘어지는 걸 배운다. 가만 보면 인생은 넘어진 자전거를 일으켜서 끌고 가는 일 같다.”

일찌감치 꿈을 이룬 분으로 알았다.
“(미소 지으며)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통지표에 적혀 있던 문구를 정확히 기억한다. ‘주의 산만. 인내력 부족.’ 인내력은 살면서 나아졌지만 주의 산만은 여전하다. 어른 ADHD다. 그냥 무계획적으로 산다. 가수도 그랬다. 나한텐 노래가 생계였다. 노래를 사랑은 했지만, 직업이 되면서 사랑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성취감은 있나.
“이거 아닌데, 이거 아닌데⋯, 하다 ‘이거다!’ 하는 짧은 순간을 보고 가는 거지.”


주의 산만하던 어린이가 삼청공원으로 가회동 언덕으로 동네 남자애들 끌고 다니며 대장 노릇하다 10대가 됐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사방팔방 노래로 빚 갚으며 가장 노릇하다 보니 20대가 됐다. 그렇게 세끼 밥 차리고 강아지 돌보며 방송국과 목욕탕, 수영장과 정발산을 오가다 보니 칠십 줄에 들어섰다. 암도 걸려 봤고, 우울증도 앓아 봤다. 그동안 사람 보는 촉은 좀 생겼으나 노래 보는 촉은 여전히 모르겠다고 했다.


노래의 운명은 부르는 가수도 예측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런 것 같다. 내 노래 중에 ‘한계령’은 음반 회사 사장이 아주 싫어했다. ‘너는 대학 다닐 때는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노래로) 나를 남산에 끌려가게 만들더니 대학 졸업하고는 왜 또 장사 안 될 노래만 골라서 부르니?’라면서 면박을 줬다. 그런데 그 노래를 사람들이 찾아내서 퍼뜨려 줬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드라마에 배경음악으로 나오면서 알려졌다. 유명 연속극, 단막극, 심지어 ‘전원일기’에서 복길이도 그 노래를 울면서 따라 불렀다. 내가 이병우와 뉴욕에서 만들어서 왔을 땐 모든 음반사에서 ‘노래는 좋은데 되겠어?’라면서 거절했던 앨범이거든. 그렇게 쓸쓸하게 흘러가다 결국 대중에게 발견되는 순간이 있다. 그걸 예측할 수는 없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을 편곡해 틱톡으로 단숨에 띄우는 세상에서, 여전히 ‘노래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는 양희은의 말은 신비롭게 들렸다.


나는 ‘한계령’을 들으며 그 바람길을 나침반 삼아 젊은 날 지리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 시절 양희은의 노래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 스산한 시간을 견뎠을까 싶다. 노래 부를 때마다 가사를 얼마나 생각하나.
“노래를 부를 때도 사연을 읽을 때도 깊이 잠수해 들어간다. 이야기 안으로 쑥 들어가지. 특히 말하듯 노래하고 노래하듯 말하기 위해서는 치아 구조까지 연구하게 된다. 발음이 깔끔하게 딱 떨어져야 정확히 전달이 되니까. 나는 노래와 방송을 거의 동시에 시작했다. 1970년대에 한 섬마을 소년이 겨울방학이 오면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내 목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견뎠다는 사연을 보내왔다. 내 방송을 들으면 공동묘지 곁을 지나도 무섭지 않다고. 나는 그 말이 너무나 무서웠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나.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나는,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 내 편이 아무도 없었다. YMCA 청소년 공간인 ‘청개구리’에 드나들다 발탁돼 열아홉 살에 방송국 왔는데, 아무도 날 보고 웃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오래 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니 많은 사람이 듣고 아껴 주면 살아남겠더라고. 그렇게 쥐뿔도 모르는 애가 지금까지 온 거다. 라디오는⋯, 사기를 못 친다. 눈 가리고 아웅을 못 해. 금방 들통 난다.”


양희은의 군더더기 없는 입말은 그의 창법처럼 천진하게 휘몰아치며 정곡을 찔렀다.


무대 공포증도 여전한가.
“여전하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익숙한 게 좋은 건 아니다. 남편은 옆에서 보고 40~50년이 지나도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긴장되고 떨리면 ‘때려치워라’ 그런다.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했는데 두려움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다. 나는 감기 기운 있을 때 노래를 더 잘한다. 목소리가 아주 맑을 때보다 컨디션이 좀 으슬으슬할 때 더 잘 나온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난 놀듯이 하는 것보다 떨리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벅찬 느낌을 받을 때는 언제인가.
“나는, 자아도취하지 않는다. 노래도 눈감고 부르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도 않는다. 내 인생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도 않다. 재미있어서 살지도 않았다. 휘리릭 시간이 흘러서 때가 되면 떠나겠지. 거창한 계획도 없고 어떤 큰일이 닥쳐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누가 나를 놀라게 하면, 그냥 씩 웃는다.”


강심장은 아닌데 사람 어려워할 줄은 모른다고 했다. 낮다고 얕잡아 본 적도 높은 사람 앞이라고 주눅 들어 본 적도 없노라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 누군가가 나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위축된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덤덤한 일흔 살 양희은을 앞에 두고 있자니, 왜 그가 부르는 노래 ‘상록수’가 늘 푸르고 서늘한지 알 것만 같았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인생의 은인은 만났나.
“내 젊은 날은 끔찍한 빚더미의 시간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가 빚보증을 잘못 선 데다 운영하던 양장점이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20대 내내 단벌 청바지에 차비도 없이 걸어 다녔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는데 쥐어짜도 돈 나올 구멍이 없었다. 파산선고라는 것도 할 줄을 몰랐으니까. 그때는 하늘에 삿대질을 했다. 아버지 몫을 내가 하고 있는데, 동생들을 이렇게 개고생시키면 어떡하느냐고. 신이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빚의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으니, 내 얼굴이 얼마나 우울했겠나. 그런데 그때 클럽에 노래 들으러 오던 사람 중에 1950년대 한국에 온 외국 선교사들이 사연을 묻고 선뜻 도와 줬다. 그 뒤로 킹레코드와 계약해 빚을 다 갚았다.”


“인생 고비마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 툭툭 나타나더라”고 배짱 두둑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기적은 그렇게 툭툭 오는 건가.
“네. 툭툭 오지, 기적은. 막다른 곳에서 툭툭 쳐 주듯이.”

30대 난소암 투병 전후 인생관이 달라졌나.
“나는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을, 너무 싫어한다. 그럴 땐 ‘언제? 어디서? 우리가 돈이 없지, 시간이 없니?’ 이러면서 막 추궁한다(웃음). 어려울 게 뭐 있어.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툭툭 하면 되지. 암에 걸려 기운 없이 누워 지내면 다 보인다. 겉으로는 ‘어떠니?’ 해도 속으로는 ‘지금 내가 네가 아닌 게 정말 다행이다’라고 하는 눈빛이 다 읽혔다. 진심으로 위해 주는 사이는 쉽지 않다. 슬플 때 같이 슬퍼하는 것만큼 기쁠 때 같이 기뻐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오지랖 넓었던 관계가 많이 정리됐다. 인생 사는 데 사람 많이 필요 없어.”

언제 행복한가.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더라. 요즘엔 집 근처 단골 목욕탕에서 목욕할 때, 불투명 창으로 빛이 스며들면 그게 얼마나 행복하고 개운한지 모른다. 변함없이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다 노래가 되더라. 예쁜 종지 하나가 깨졌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맛있게 끓었다⋯, 그런 게 다 하루하루의 노래였다.”


배꼽 밑에 꾹꾹 쟁여둔 일상 밑천이 결국 노래로 돌아온다고 했다. 노래를 안 할 때 노래를 잘 살고 있는 거라고. 그 자신, 가장 큰 걱정은 백 살 가까운 노모와 열일곱 살 넘은 노견이라고 했다. 잘 못 걷고 잘 못 듣고 잘 못 보는 그들을 돌보며 ‘저것이 나의 길이다’ ‘저것이 나의 앞날이다’를 되새기는 삶. 그럼에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도시락 싸고, 방송국에 나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시장 보고 된장찌개를 끓여내는 양희은의 쳇바퀴 삶이 그의 배꼽 아래 쌓여 세상을 보살피는 은은한 노래로 나오는 걸 우리는 목격한다.


50년 넘게 노래해 보니 힘주기와 힘 빼기 중 무엇이 더 어렵던가.
“시작을 잘하면 끝까지 잘 풀린다. 노래는 첫 소절, 시작이 반이다. 처음에 힘 조절 못 하면 끝까지 헤맨다. ‘상록수’라는 노래는 높은음으로 지르는 노래라 힘 빼고 시작하기가 정말 힘든다. 힘을 내듯 또 살짝 빼면서⋯, 결국 노래도 삶도 평생 힘 빼는 연습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제일 좋은 노래는 콧노래다. 아무도 듣지 않고 나 혼자 부르는 노래⋯, 그게 제일 살아있는 노래 같아.”


다시 태어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쉬다 가는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바람에 힘 빼고 나부끼는 잎새처럼, 바람에도 뱃심으로 지탱하는 나무처럼, 그렇게 주의 산만한 채로 명랑하게 뚱딴지같이 늙어가겠다는 양희은. 나무가 되어가는 그를 보며, 그의 노래로, 가을을 맞는다.